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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日部特養死傷事件」読売新聞さいたま版に、コメントが載りました。 [権利擁護]

【虐待通報・調査に難問】
「春日部特養死傷事件」読売新聞さいたま版(2013.6.14朝)に
コメントが載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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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서대문형무소는 당시의 일본의 미야기 형무소와 같은 설계이었다 합니다. [非暴力]

내 할아버지
나의 외가의 할아버지는, 전쟁에 반대인 입장을 주장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1939년의 치안유지법 제2차 일제검거로 보교활동중에 체포되어, 1945년 9월에 석방될 때까지 6 년간 투옥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석방의 약 2 개 월후에, 간병의 보람도 없고 할아버지는 사망해버립니다.
장기에 걸치는 투옥 생활과, 전향을 거부했기 때문에 받고 있었던 심한 고문에 의해 신체가 끝까지 쇠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패전후에 옥중에서 죽으면 책임문제가 된다」라고 생각한 당시의 공안은, GHQ의 명령이 내리기 전에 서둘러 석방한 것 같습니다. 「옥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 말이에요. 아버지는 우리들 아이들에게 『이제부터는 좋은 아버지가 되야겠네』라고 말해 주었어.」
 나의 이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어쨌든 내가 학생시절에는, 아버지는 쭉 형무소에 있었던 셈이기 때문에 ···. 지금 생각해보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지만, 당시는 민주주의따위 아무것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투옥된 이야기는, 『부끄러움』이라고 생각되고 있어서 가족들이 모두 피하고 있었고, 최근에 들어서나서에요, 이런 이야기하는 건」 이모는, 슬픈 추억을 상기하고 싶지도 않고 남편에 필요 없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오랜 세월 입을 다물어 온 것이었습니다.
 「석방되어서 어디선가부터 정부에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아버지는, 『일본도 좋아해서 전쟁을 한 것이 아닐 것이다』고 말해, 청구할 필요는 없다고 해.
『전쟁이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 이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모두 전쟁이 안되는 거야』라고 했어」 「어쨌든, 어머니(나의 할머니)도 장녀도 체포되고. 아버지는 혼자 부교활동중이었기 때문에 집에는 없었지만 ··· , 부교활동중에 체포된 것이어요. 」
「우리들은 센다이(仙台)에 살고 있었어. 아침 일찍, 4시경이었어. 누군가가 빈지문을 쿵쿵 두르기 시작했어. 그들은 목소리는 내지 않았네요. 구둣발로, 맞아. 모두 구둣발이었어. 경찰들이 들어왔어. 장롱 서랍을 열어서 편지를 전부 가져 갔어. 내가 초등학교의 오학년생이었어요. 」 「도쿄(東京)에서 죽은 언니가 살아 있을때 나에게 보내준 소중한 편지가 있었어.
『이것은 언니가 보내주신거니까 ···! 』 하고, 가져 가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형사는 날을 들이받았어요. 몸이 공중에 뜬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신앙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쓰이고 있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가져 가 버렸어요. 언니가 보내준 편지. 슬펐어.」
나의 어머니도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그다지 기억하고 있지 않아. 하지만, 초등학교에 오르면 선생님은, 아버지가 형무소에 있다고는 이유로 나에게 엄격했어. 손목의 안쪽에 얼음을 태워서 서게 해서, 기절한 적이 있었어. 선생님이 그렇기 때문에, 동급생에게도 괴롭힘을 당했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니까 시간이 걸려서.. 편도 2시간정도 걸렸는가… 혼자 미야기(宮城) 형무소에 갔어. 높은 벽이었어.
이 벽의 안쪽에 아버지가 있구나라고 생각하는것만으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은 마음이 생기는 거에요.
또 2시간 걸어서 집에 돌아가면, 이미 밤도 깊어지고 있어 가족의 모두가 걱정하고 있었어. 가족은 어디에 가 있었던 거냐고 물었지만, 나는 가족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다. 자신만이 비밀로 하고 있었어. 혼자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갔어요」

나는, 할아버지를 써 두고 싶어, 어머니에게 듣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어머니는 오열하면서 이 것을 처음으로 이야기했습니다. 50년이나의 동안 혼자, 마음의 안 쪽에 챙기고 있었던 것이네요.
 할아버지의 소속해 있었던 기독교의 그 모임은, 미국에 본부가 미국에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 얼마 안되어 본부는, 이 전쟁은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옳은 전쟁이었다라고 총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들은 성서에 근거해 「전쟁에 옳은 전쟁은 없다」라고 반론했습니다. 교단본부는 할아버지들을 파문하고, 현재도 이단자라고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진 할머니와 어머니들 자매는, 신앙으로부터 떨어졌습니다.
당시의 일본은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을 비국민과 부르고 법률에 근거해
공무원을 이용해 우격다짐으로 개인의 신조를 바꾸게 하자로 했습니다.
인권은 세상의 정의보다도 우선되는 인간의 존엄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전쟁은 인권을 무참하게 짓밟는 행위입니다.
 현재에 일본에 있어서도, ‘인권’을 추구하는 사람을 ‘정의의 아군’
이라고 웃거나 , 이데올로기적인 레테르를 붙여서 정리해버리는 풍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인권이라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피’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석방후 약 2개 월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생각은, 내 몸과 마음속에 살아 있다… 최근 그런 생각이 듭니다.
 법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눈앞의 인권에 관심을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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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nnta13.blog.so-net.ne.jp/2007-09-25
서울의 서대문형무소는 당시의 일본의 미야기 형무소와 같은 설계이었다 합니다.

ぼくの祖父のこと
 僕の母方の祖父は、戦争に反対の立場をとるキリスト者でした。
祖父は、1939年の治安維持法第二次一斉検挙で伝道中に逮捕され、1945年9月に釈放されるまで6年間投獄されていました。
 しかし、釈放の約2ヶ月後に、看病の甲斐もなく祖父は死亡してしまいます。
長期にわたる投獄生活と、転向を拒否したために受けていた激しい拷問により身体が衰弱しきっていたのです。
「敗戦後に獄中で死ぬと責任問題になる」と悟った当時の公安は、GHQの命令の前にすぐに釈放したようです。「獄死」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でしょう。

 僕の母方の伯母は語ります。
「釈放されて家に帰ってきたときね、お父さんは私たち子供に 『こんどは、いいお父さんになるからね』って言ってくれたの」と声を震わせます。

 「なにしろ私が学生の頃、父親はずっと刑務所にいたわけだから・・・。
今なら何にも恥じることはないってわかるけれど、当時は民主主義なんて何も知識がなかったから・・・。
お父さんが亡くなったあと、お父さんの投獄の話しは、『恥』だって思っていて家族みんなで避けていてね、最近になってからだよ、こんな話しするのは」

 伯母は、つらい事をあえて思いだしたくもないし、連れ合いにいらぬ誤解をされたくもないために長年黙ってきたのでした。

 「釈放されてすぐにね、どこからか政府に賠償金の請求ができるようだって聞いたけれど、お父さんはね、『日本も好きで戦争をしたのではないだろう』って請求する必要はないって言うの。
『戦争というもののために、こんなことになったのだから。ぜんぶ戦争がいけないんだ』って言っていた」
「なにしろ、お母さん(僕の祖母)も長女も逮捕されたし。父さんは一人で伝道中だったから家にはいなかったのだけれど・・・、伝道先で逮捕されたのよね。」

 「私たちは仙台に住んでたの。朝早くね四時頃だった。雨戸をドンドンドンって、声は出さなかったね。土足でね、そう、みんな土足だった。警察の人たちが入ってきた。
タンスの引き出しを開けて手紙を全部持っていくの。私は小学校の五年生だったよね。」
「東京で亡くなった姉さんから、私あての大切な手紙があってね。
『これは姉さんからのだから・・・!』って、持っていかないでって頼んだのだけど、刑事に突き飛ばされた。身体がポーンと宙に飛んだのおぼえてる。信仰のことなんか何も書いてなかったんだよ。持っていかれたの、姉さんからの手紙。悲しかった」

 僕の母も語ります。
「私は小さかったから、あまり覚えていないの。でもね、小学校にあがると先生は、父が刑務所にいるというので私に厳しかった。手首の内側に氷を乗せて立たされて、気絶したことがある。先生がそうだから、同級生にもいじめられた」

 「小学校低学年の足だから、片道2時間ぐらいかかったかなあ・・・一人で宮城刑務所に行ったの。高い塀だった。
この塀の向こうにお父さんがいるんだって、思うだけで父に会えたような気になれるのよ。
また2時間歩いて家に帰ると、もう夜もふけていて家族のみんなが心配しているの。どこに行ってたのって聞かれても、私は家族に決して言わなかった。黙って自分だけの秘密にしていた。一人で、何度も何度も行ったのよ」

 僕は、祖父のことを書きとめておきたいと思い、あらためて聴く機会を持ちました。そこではじめて、母は嗚咽しながらこの事を語りました。50年ものあいだ一人で、心の奥にしまっていたのですね。

 祖父の所属していたキリスト教のその会派は、アメリカに本部を持っていました。戦後まもなく本部は、この戦争は侵略に対抗する為の正しい戦争だったと総括したといいます。しかし祖父たちは聖書にもとづき「戦争に正しい戦争はない」と反論しました。教団本部は祖父らを破門し、現在も異端者としていると聞きます。

 孤立無援で残された祖母と母達姉妹は、信仰から離れました。
当時の日本は、戦争に反対するものを非国民と呼び、法律に基づいて、公務員の手によって力ずくで個人の信条を変えさせようとしました。
人権は、世の正義よりも優先される人間の尊厳だと思います。また、戦争は、人権を根底から踏みにじる行為です。

 いまの日本にあっても、「人権」を口にする人を「正義の味方」と茶化したり、イデオロギー的なレッテルを貼って片付けてしまう風潮があります。
しかし僕は、だれが何と思おうとかまいません。
僕の心の中で、人権という言葉が大切な響きを持って存在しているのだからしかたないのです。もしかすると祖父の「血」なのかもしれません。
釈放後2ヵ月あまりで亡くなった祖父の思いは、僕のなかに生きている・・・最近そんな気がします。

 法は人を生かしも殺しもする。そんなわけで僕は、目の前の人権に、無関心ではいられないのです。


韓国ソウルの西大門刑務所歴史館(当時の日本の宮城刑務所と同様の設計だったと言われている)

<参照>
兵役を拒否した日本人—灯台社の戦時下抵抗 (岩波新書) [新書]
http://mediamarker.net/media/0/?asin=4004150191

灯台社とその前後の時代にかかわった人たち
http://www.geocities.jp/todai_sha/relative_persons/relative_persons.html
(村田 芳助 1893年頃誕生~1945年死去。仙台でパイオニヤ(コルポーター)。秋田県横手の駅長。1939年(昭和14)6月21日,宮城県で検挙(46歳)。以後,6年獄中生活。多くの拷問を受けたため,終戦出所後1か月で衰弱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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